6월 중순 어느날.

기자가 작별인사를 위해 찾아갔을 때, K부장은 차분하게 명함을 한장 한장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지 올해로 38년째. 꿈많던 열혈 청년이 머리 희끗 희끗한 초로의 장년이 되기까지... 긴 세월입니다. 그것도 한 직장에서 말이죠.   

입행 이후 은행 IT본부에서 잔뼈가 굵은 K부장은 ‘임금 피크제’와 ‘명예퇴직’ 두 가지의 선택에서 고민하다가 최근 명예퇴직을 선택했습니다. 퇴직을 해도 간직해야할 추억과 사람은 여전히 많은가 봅니다. 명함 정리에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퇴직, 그래도 난 행복하다”

“딸은 작년에 시집을 보냈고, 아들은 미혼이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홀가분합니다.”

K부장은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퇴직을 앞둔 소회가 어떻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가장(家長)으로써, 아버지로써의 책임을 대과없이 완수했다는 데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대한 진한 아쉬움과 미련, 그런 것 보다는“이제 자유를 얻었다”며 행복해 했습니다.

요즘처럼 불안한 국내 고용 문화에서 거의 정년까지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만족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최근 외신에 따르면, HSBC보험그룹이 17개국을 조사했더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은퇴’하면 떠오르는 것이 ‘돈 걱정’이었고 영국인은 ‘자유’라고 대답했다는데, 이런 기준에 맞춘다면 K부장은 평균적인 한국의 샐러리맨들보다는 행복한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다만 K부장에게 ‘도대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만족을 하시길래‘자유’를 느끼시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경제적 만족도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매우 ‘상대적’이기 때문이죠. 특히 은퇴를 앞둔 시기, 삶의 가치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그런 나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수만금을 손에 쥐고 있어도 그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자유’를 느끼지 못할 것이고, 소박하지만 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 진정으로 ‘자유’를 느낄겁니다.

평소 K부장의 소탈한 성품을 감안할 때, 그는 후자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퇴직후 계획? 생각해놓은 것은 있지만...”

그는 퇴직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조금씩 생각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아직 구체적이진 않지만 취미로서 ‘침술’ 배우는 것 등을 생각하고 있다는 군요.

물론 K부장은 지난 38년간 IT인으로써 몸에 밴, 마치 본능과도 같은 생활습관 때문에 조금은 멍하다고 했습니다.

 “며칠전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왔는데 처음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못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또 “(막상 퇴직하고나니) 부부가 따로 특별하게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면서 웃었습니다.

누구나 은퇴 이후를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됐을때는 긴장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K부장에게도 은퇴 이후의 삶은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갈 듯 합니다.  

 

한편‘(은행원으로써) 임원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K부장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솔직히 아쉬움은 크게 없습니다. 애초부터 욕심을 내지 않았으니까.... ”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예전 은행의 IT부서는 한직으로 인식됐습니다. 쉽게말해 ‘승진 코스’가 아니었죠.

 

은행내 부행장급이 IT부서의 업무까지 분장해도 실제로는 IT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CIO의 역할이 정착되기 이전, 10여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IT부서장 선에서 IT전략및 의사결정이 대부분이 이뤄졌습니다.‘전산부장’, ‘전산정보부장’이 사실상 CIO(최고정보화담당 임원)으로써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부장 직급이면 아쉽지만 IT부서에선 올라갈때까지 갔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종합온라인, 차세대... 가장 기억에 남는다”

 

IT부서에 근무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무엇일까요?

K부장은 지난 1990년대 초반, IBM기반의 '종합 온라인'환경으로의 전환, 그리고 2005년 차세대시스템으로의 전환,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물론 직접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농협 전산마비 사태도 그에게는 잠재적인 위험이 현실화된 사건으로 남는다고 했습니다.

“종합온라인 도입은 우리 나라 은행의 업무처리가 IT기반으로 전환한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건입니다. 물론 1970년대에도 은행 전산화는 시작됐지만 은행 업무 프로세스가 혁신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종합온라인이라고 봐야죠.”
 
K부장은 간부가 돼 수행한 지난 2005년의 ‘차세대시스템’ 프로젝트에 대해선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사실 기술적으로 두려움이 많았다”고 술회했습니다.

실제로 K부장이 속한 E은행은 국내 대형 시중 은행중에서는 처음으로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 개방형 환경으로 전산시스템을 전환함으로써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고, 이후 많은 은행과 2금융권에서 유닉스 기반의 차세대시스템 사업이 줄을 이었습니다.  종합온라인과 차세대사업은 그에게 IT인으로 살아온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빛나는 훈장입니다.

 

◆전산장애 스트레스로부터 해방

K부장은 커피를 앞에 놓고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이러 저런 얘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최근 일어난 현대캐피탈과 농협 전산장애에 대한 생각, CIO의 역할, 외국계 은행과 국내 은행과의 장단점 비교, 금융회사 IT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스마트 금융 등등 IT전문가로써, 인생선배로써 말이죠. 

특히 K부장은 “스마트폰과 모바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금융산업에 있어서도 거스를 수 없는 새로운 조류”라고 규정하고, 어려운 과제를 맡은 후배들을 격려했습니다. 

K부장은 기자와 만나는 1시간 여동안, 담배 한 개피를 손에 들고만 있었습니다.

‘부장님, 이제 인터뷰가 거의 끝났습니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불을 붙였습니다.

‘이젠 담배도 끊으셔야죠?’라는 말에 K부장은 “사실 내가 예전에 두 번 끊은적이 있어요. 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K부장은 담배를 끊기위해 서울 인사동에 있는 전문 기치료사에도 치료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때마다 ‘전산장애’가 발
생해 결국 다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는군요.

K부장에게 전산장애는 애써 끊었던 담배를 다시 찾게할 정도로 만성적인 스트레스였다고 생각하니 안쓰럽습니다.

 ‘이번엔 금연에 꼭 성공하시겠네요. 앞으론 전산장애 걱정할 일이 없으시니...’ 라고 웃으며 작별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K부장도 호탕하게 같이 웃어주었습니다.

 

[박기록 기자의 블로그= IT와 人間]


2011/06/27 16:49 2011/06/2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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